본문 바로가기

정치외교/동아시아정치경제론

동아시아정치경제론 (8) 아세안의 발전과정

- 아시안 10국에 대하여.

 

주로 살펴볼 국가: 싱가폴, 필리핀, 베트남(사회주의 국가).

 

 

당시는 중국이 청나라였다. 화도라고 부르는 청나라 일꾼들이 저렴하면서 부지런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기후의 영향 때문에 게을렀다. 영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청나라 사람들을 활용했고, 이것이 훗날 화교로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화교의 영향은 굉장히 크다.

 

말레시이사의 경우에도 화교의 영향이 크다.

대만, 타이완 등에서 아편전쟁으로 인해 넘어온 인구도 많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우, 또한 필리핀 또한,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배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

1945년 이후에 많이 독립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 자결주의, 민족주의'의 개념이 확산되면서 많이 독립한다.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 동아시아 발전국가와 동남아시아 발전국가

 

한국, 대만, 홍콩, 싱카포르 중에서 홍콩을 제외하고 한국, 대만, 싱가포르를 2진 발전국가라고 부른다.

1진은 누구인가? 당연히 서구이다. 유럽, 미국 등의 서구 경제 주도권 국가.

신흥 산업국은 2진으로 부른다. 3진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들을 부른다. 이 국가들은 해안국이다.

내륙국의 경우, CLMV라고 불린다.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우리나라는 해안국이다. 위가 북한으로 막혔기 때문에. 북한은 때문에 대륙으로 구분된다.

중국은 대륙. 해안은 미국, 영국, 일본으로 보기도 한다.

해안 <-> 대륙으로 나눠서 연구하는 시각들도 많이 존재한다.

 

 

- 2진 발전국가의 특징

1) '강한' 국가가 엘리트로 구성된 관료들로 선도기구를 갖추었으며, 경제에 개입하여 시장경쟁력있는 기업을 육성하는, 국가주도적인 산업정책 및 금융정책, 국내 저축을 통한 자본 동원, 수출 확대 정책.

2) 유교문화에 기반하는 근면함, 질서 중시. 

3) 미국이 이 국가들에 대한 보호주의를 허용. 미국과 관련된 시장 개방을 어느정도 요구.

4) 노동억압정책과 권위주의 정치체제.

 

 

- 한국, 대만,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의 시점이 있다.

1) 한국의 경우: 재벌 중심 성장 위주의 발전전략을 채택.

2) 대만의 경우: 사영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 도모, 국영기업이 이를 지원, 성장과 안정을 동시에 추구.

3) 싱가포르의 경우: 국영기업,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지원 - 산업화 도모. 

사회경제와 공유경제의 구분.

기업의 경우도 사기업과 공기업이 나뉜다.

싱가포르의 경우 - 희한하게 믹스. 공유경제이지만, 국영기업이 사기업처럼 기여/역할을 했다. 그렇게 산업화를 도모.

 

- 3진 발전국가들은 한국과 대만 정도로 높은 국가 자율성을 지니고 있지 못했고, 시장기제에 더 의존했다.

1980년대까지 자국 산업을 양성하는 산업정책, 국가 은행 시스템을 이용한 사적 부문과의 파트너집을 제도화 - 성장지향의 경제정책.

우리나라의 경우 투자보다 차관을 도입. 엘리트층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적 범위가 넓었다.

사적 범위가 크면 탑다운의 성장전략은 힘들다.

 

 

 

- 싱가포르

 

- 싱가포르의 역사적 배경

영국 동인도 회사의 래플스 경이, 센토사 섬의 조호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영국 영향 아래에 두고 항구도시로 개발하기 시작. 영국군의 동남아시아 최고 거점이 되면서 도시 개발을 위해 저렴한 임금으로 청나라 사람들을 대거 고용하여 이주.

-> 때문에 화교가 많아졌다. 

 

+ 지정학적 중요성이 굉장히 컸다. 항구도시로서의 역량이 굉장히 높았다.

 

1941년에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영국이 일본에게 패전한다. 일본에게 점령당해 군정통치를 3년가량.

당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 중국과 싸웠다. 싱가포르에는 중국계가 많다. 중국계가 예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최소 3만명 정도의 중국계를 학살했다고 한다. 많게는 10만명까지.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 영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간다.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독립하면서, 싱가포르도 말레이시아의 한 연망주로 독립을 추구했다. 1959년-1965년까지는 말레이시아에 편입되어 자치시대를 거쳤다. 1965년에 말레이시아에 의한 강제적 분리독립.

싱가포르를 영국히 항구도시로 개발. 굉장히 잘 살았고, 경제적인 능력도 좋았고, 화교가 상당히 많았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와 화교 사이의 긴장감이 높았다. 싱가포르의 영향력이 말레이시아까지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차단하기 위해 독립시켰다.

싱가포르가 독립을 요구해서 독립한 것이 아닌, 말레이시아에 의해 독립당했다고 할 수 있다.

 

 

- 정치적 배경

싱가포르 하면 굉장히 중요한 지도자 한명: 리콰뉴.

우리나라에서 지도자가 굉장히 변화하는 동안, 리콰뉴는 리콰뉴 단 한명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일당 독재를 굳건하게 유지해온 인민행동당의 사무총장이 리콰뉴.

인민행동당이 주축이 되어 발전국가 모델을 채택.

싱가포르 자주독립 이후, 계속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총리들을 배출.

 

1959년 총선 실시. 노동전선의 마샬이 최초의 수석장관, 좌-우익간 연합 정당 PAP의 사무총장 리콴유가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훗날 좌파 체력 척결이 조금 있었다고도 한다.

리콴유 주축의 '유기적 집단지도체제' 유지.

엘리트들이 자치정부 출현, 총체적 위기에서 탈출 모색하기 위해 추구한 모델이 발전국가 모델.

 

수입대체 -> 수출주도로 변경.

수출주도때에 외국 자본의 투자를 많이 받았다 <-> 우리나라의 경우 실제로 수출을 많이 했다.

 

 

- 경제적 배경

지정학적 영향력이 높다.

말레이시아와 붙어있으며 밑에 섬나라로 존재. 말레이시아로의 의존도가 높고, 중계무역에 의존했다.

하지만 중계무역은 국제정서가 불안정해지거나 민족정서가 강렬해지면 취약함이 높았다. 그때마다 마이너스 성장률을 거듭했으며, 결과로 실업문제/노동자 파업/쟁의문제 발생.

외국인 투자자들이 그로 인해 떠나게 되었다. 중계무역에 의존한 싱가포르는 기업가적 전통, 산업자본, 기술축적이 없었다.

 

- 문화적 배경

대다수의 중국인, 소수의 말레이인, 인도인, 기타 유럽인 구성.

! 종교문제: 중국계는 불교, 도교, 카톨릭. 말레이인의 90%는 이슬람교. 인도인들 대부분 힌두교. 일부가 이슬람교. 

 

- 지리적 배경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로의 요충지.

말레이시아, 인도네이사 같은 커다란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 - 두 나라간의 갈등이 심해지만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 싱가포르의 경제 고속성장의 시작: 수출주도형 산업화 시기. 발전국가모델 도입.

1) 국영기업 주도 - 사기업처럼 운영하며 국가기업이 국내 부르주아의 역할을 수행.

2) 싱가포르가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하게 된 요인: 통치 엘리트의 리더십 역할이 중요. 

 

 

 

- 필리핀

 

식민지배의 역사가 상당히 길다. 

 

300년 가까이 스페인 식민지로 있었다.

1898년에 독립선언을 했지만, 미국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1942년에 일본 점령기를 잠시 거쳤다가, 이후 1946년에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비로소 필리핀 공화국이 세워졌다.

 

 

동아시아 냉전 질서 하에서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들 가운데, 왜 한국, 대만, 싱가포르에서는 발전국가가 출현한 반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는가?

- 발전국가: 정부 주도로 관료와 전문가, 민간 영역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경제성장에 역량을 집중하는 국가 형태.

- 약탈국가: 정치 지도자와 그의 측근들의 사익을 위해 정부와 민간 영역을 약탈하는 국가 형태.

 

어떤 조건에서 국가 지도자가 발전국가를 선택하거나 약탈국가를 선택하는가?

 

필리핀의 주요한 지도자: 마르코스. 1965년부터 독재 시작. 1986년 20년동안 독재.

이후 그 사람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지지율 1위, 권력 세습과 동일.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인 사라 또한 부통령으로 취임. 

 

민주화 87년 우리나라.

88년에 필리핀도 민주화. '피플스 파워' 시민혁명으로 인해 마르코스가 축출. 사라 부통령의 부친 역시 마약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사법절차 없이 마구 처형한 혐의로 인식된 문제적 인물.

권위주의적 인물들의 자식이 대통령, 부통령으로 당선. 필리핀 사람들이 강력한 통치를 그리워하는 표상이 아닌가?

 

마르코스는 박정희 대통령과 유사한 측면.

1965년, 1969년 대통령선거 모두 승리. 3헌 개헌에 실패하자 1972년 계엄령 선포, 국회 해산, 박정희 유신과 유사한 신 사회 선포.

 

우리나라의 경우, 재벌을 밀어주기 전 양반들 - 지주들의 권세가 막강했다. 농업계의 지주들을 정리하는 과정, 토지개혁이 있었고 우리나라는 성공했다. 하지만 필리핀은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핀을 지배하는 세력이 대지주세력. 대지주세력에 의해 정치가 끌려갈수밖에 없었다 - 선거자금에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주계급의 이익에 어긋나는 개혁 시도는 저항과 방해에 직면하여 좌절했고 - 선거에 있어 후보자의 정책적 비전 < 정치자금 확보에 초점. 마르코스는 장기적인 국가발전 < 권력유지를 위한 자금 확보에 집중.

 

부패 때문에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대외부채가 늘어나고, 그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다.

결국 채무주도성장이라 불릴만큼 엄청난 대외부채의 증가가 야기되었다.

 

 

 

- 베트남 전쟁

 

중국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침략,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다.

또한 프랑스령이었던 역사도 존재한다.

 

우리나라 또한 프랑스 사람들이 들어왔다 - 가장 먼저 선교사들. 베트남에도 들어가면서, 선교사들을 박해한 역사. 그것을 빌미로 프랑스가 침략했었다.

 

프랑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던 와중, 소련 진영-공산주의 세력과 미국 진영-자유주의 세력이 양분되어 개입. 

 

베트남 독립 전쟁 =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1954년. 이후 분단된 베트남.

 

1955년-1977년까지 벌어진 전쟁.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 =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 진영 vs 공산주의 진영의 대리 전쟁 양상. 이후 국제전으로 확산.

 

1964년-1973년까지 미국이 개입, 간섭. 

1963년 닉슨 대통령의 닉슨 쇼크. 중국과의 손을 잡고, 소련 - 중소관계의 악화. 미국이 닉슨쇼크로 인해 변동환율제로 변경. 정세가 지금처럼 굉장히 복잡하던 시기. 더불어 석유파동 발생 등.

당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며 공산주의vs자본주의 -> 미국이 역량 투입. 국제정세적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 미국의 경재력 대다수가 이곳에 투입 - 미국이 휘청거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북베트남 승리. 현재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국의 정당성이 약화되었다는 측면.

 

 

- 농업부문은 초기 개혁과정에서 중요한 개혁의 기반이 된다. 

1970년대 탈법적 생산물계약제가 확산. 이만큼 생산하면 이만큼 돈을 주겠다는 계약. 지방 간부 - 농민 사이에 체결. 이후 공식적인 국가 정책으로 채택.

한계가 있어 정체된다. 공산당과 정부가 1988년 농가경영제 도입(자율성 추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여 장기간 사용권을 부여, 농민들은 실질적으로 소유권과 같은 수준의 권리를 행사한다.

생산물 증대 효과. 1989년부터 쌀 수출국으로 전환.

 

- 1986년부터 '도이머이' 정책 채택. 개혁개방.

1988년 외국인투자법 시행, 1990년 기업법 입법.

국영기업을 유지하되 시장경쟁력을 갖도록 정책 추진.

이후 외국인투자 확대 + 국영기업 활성화에 집중.

 

=> 효과가 있었다. 대체로 성공적. 연평균 GDP 증가율이 고성장. 빈곤율도 급격히 감소.

 

베트남의 경우 주석이 계속 사임한다. 내규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