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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일본정치론

일본정치론 (12) 미일동맹과 중일관계

- 전수방위: 군대가 없다고 해서 타국이 공격하는데 방어를 안 할 수는 없다. 전적으로 방위를 한다는 의미의 전수방위. 자위대의 존재 인정.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국가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국제문제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발생.

- 후쿠다 독트린 - 아시안과의 관계, 원조의 사용. 일본의 적극적인 외교 움직임.

 

- 걸프전에서의 수표외교 비판. 보통국가로의 전환 주장.

고이즈미, 아베 총리가 주로 주장. 일본의 국제적, 군사적 역할을 만들어나가는 변화.

 

- 경제외교 분야: 일본이 경제력을 활용해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특히 강조하는 것이 인간안보. 일본의 지도자들이 개념을 캐치해서 사용. 유엔에서 인간안보 기금 설치, 여러 분야에서 기여.

- 인간안보: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 = 전쟁영역이기 때문에 불가능,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신경을 기울인다. 의료, 보건, 교육, 문화. 다른 나라들로부터 많이 인정받는 일들을 하게 된다.

 

- 최근의 경제외교: 중국의 부상 속에서 일본이 어떤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가.

 

국제 중견주의, 편향주의 국가로부터 보통국가로 변해가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려하는 것은 군국주의. 아직까지 그렇게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 그러나 궁극적 추구는 과거와 같은 패권국가이지만 - 여러가지 제약이 존재한다. 반 군사주의, 미일동맹 등의 제약.

 

 

 

외교안보 분야와 겹치는 부분. 미일동맹, 중일관계.

인도 태평양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

 

일본에게 중요한 나라 두 개, 미국과 중국. 국제정치의 현실이라는 것은 강대국과의 관계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두 국가이다. 미중관계라는 것이 가장 큰 변수이며, 그 사이에서 일본이 어떻게 해나가느냐를 논의한다. 그 안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생각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미일동맹을 통해 강한 결속력. 발전시키고 있는 단계. 미일동맹은 미국으로서도 유용하고, 일본으로서도 유용한 동맹이다. 그를 통해 보통국가가 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들이 있다. 미일동맹의 근간을 흔들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라는 전망.

 

중국과의 관계는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다. 다만, 2000년대가 지나고 센카프 충돌사건이 발생하면서 전후로 갈등이 강조되었다. 갈등이 강화되었다고 하여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는 일은 없고(외교에는 그런 일은 없다) 미중갈등 속에서 주로 미국 편에 있지만 완전히 편을 든다는 것은 아니다.

 

개항을 요구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시작. 불평등조약의 시작. 기본적으로 서로 좋은 관계였다(비록 태평양 전쟁이 있었다고 해도). 조약 체결 - 당시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용인,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이 용인 - 반미적인 사람들이 이를 자주 사용한다.

 

한편으로 남만주에서의 갈등 존재. 왜? 만주라고 하는 지역은 청나라가 크게 영향을 못 미치는 지역, 서구 열강들이 철도와 자원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면서 갈등이 발생.

 

1차 세계대전 - 일본이 승전국의 지위. 제국주의 국가로서 힘을 강화.

이후 전쟁 우려 심화 - 군비를 강화. 국민들의 삶이 당연히 어려워지고, 군충을 시작. 워싱턴 군충회의 발생. 해군력의 억제.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침략과 약탈을 막기 위해서 -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나라들이 서로 가질 수 있는 주력함의 무게 등을 결정.

 

기본적인 의도: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자. 왜? 국가간의 관계조차도 일종의 인종주의가 작동하기 때문. 일본의 관점에서 서양 세력이 자신들을 견제한다고 느끼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서구 국가들에 대해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 전쟁의 싹이 시작되었다.

 

황인종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 주류였다. 법을 만들면서 아시안 사람, 특히 중국과 일본 사람들의 이름이 금지되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적대감을 발생시켰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만주 지역에서의 서로의 이권 다툼에서 일본이 유리한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즉, 일본이 침략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싫어한 것이 아니고, 경젱 관계에서의 반발이었다.

 

만주지역은 중국 땅이기는 했지만 굉장히 모호했다. 하지만 이후 중일전쟁은 중국의 핵심 지역(난징, 베이징 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구분된다. 일본 교과서에서는 15년 전쟁으로 표현. 보통은 '중일전쟁'으로 규정.

 

그래서 국가들간의 갈등 탄생. 일본이 표현하기를, ABCD vs 일본. 그런 가운데 일본이 힘을 너무 키우니까, 다른 국가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1941년 석유 금지 조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종전. 1951년 9월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태평양 전쟁 천상. 영토 문제, 배상금 문제 등의 해결. 당시의 총리인 요시다가 결심한 것이 미일 안보조약 서명. 55년도, 한국전쟁이 이미 시작된 시점에서는 소련과 미국의 전쟁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미국이 일본에의 군 주둔을 허용받고, 미국이 일본에게 대신 일본이 공격받게 되면 보호하는 약속.

그런 가운데 냉전이 심화되면서 - 미국이 일본에게 재무장을 요구하게 된다. 헌법 구조 때문에 군대를 받을 수 없다면서 경무장 우선을 말한다. 어쨌든 미일동맹이 당시 일본의 유일한 동맹이었지만, 동맹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지금은 평가받는다.

 

무엇이 이상한가? 동맹을 위해서는 공통의 위험의식이 있어야 한다. 왜? 미국에게 있어 소련은 강력한 적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아니었다(이후 국교정상화 진행).

또한 동맹을 왜 맺었는가? 세력균형을 위한 군사동맹. 진짜로 일본의 자위대와 미국의 군의 협력에 대한 내용은 부재. 때문에 부족한 동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0년대 안보조약 연장 - 개선되면서 변화. 일본 본토 내에서 미국의 군인들이 공격받으면 일본의 자위대가 방어할 수 있다. 여전히 논란이 된다, 군사력의 사용 자체가.

 

 

 

- 냉전 이후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 고려. 미일동맹이 정말 필요한가?

더불어 비자민당이 선출. 약화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했다.

 

- 다자주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대등하게 협력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성범죄 사건 - 미국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진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론적으로 미일동맹이 오히려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 배경: 양국의 안보전문가, 정치학자들이 미일동맹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기타루카 시미치라는 사람이 일본의 자주방위론은 문제가 있다면서, 혼자서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미일동맹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 단순히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아닌, 아시아 태평양 지대에서의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 즉, 소련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미군이 일본에 있음으로 기본적으로 아시아의 안전이 지속된다.

 

미국 또한 중국도 있으니 다른 관계를 지속해도 되는 것은 아닌가? 아시아 지역에 중요한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이익을 일본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 미군의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행사.

 

결과적으로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 자민당이 사민당과 연립하면서 무라야마가 사퇴하고 하시모토가 총리가 되면서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미일동맹 강화의 선언을 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생각해보라, 과거에 영일동맹을 맺어서 우리가 당시의 선진국이 되어 세계를 주도한 국가가 되었다. 강한 국가와 함께했을 때 우리가 번영했다. 미국과 함께 간다면 우리의 번영은 계속 될 것이다."

 

1997년, 지침 변화. 미군에 대한 후방 지원 본격화. 일본 내에서만 도왔지만, 이제 일본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가서 후방 지원 할 수 있다. 90년대 중후반, 미일동맹 강화, 자위대의 역할 확대.

 

결과적으로 미일동맹이 재정의 되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2000년대, 미국 내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아민티지 보고서. 일본이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80년대가 지나고 나서 90년대부터 쇠퇴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혼자서 전세계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나눠야 한다.

 

집단자유권 문제 때문에 미일동맹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아베 총리의 해석개헌 또한 미국이 압박해 강제로 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 유사시에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 집단자유권을 얻어야 한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이 중동에 집중.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다. 그 사이에 중국이 계속해서 성장한다.

 

중국이 너무 커지면서 글로벌 패권국가로서의 지위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아시아로의 회귀 - 아시아 재균형 발언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발생했다. 아시아에서 미국만큼의 힘을 발휘하는 국가가 중국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억제하기 위해서. 정책적인 배경. 

 

그런데 당연히 미국의 입장: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사용. 민주당이 집권, 하토야마,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제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져가겠다고 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미국은 불구하고 일본 내부의 친미주의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토야마는 그만두게 되고, 간나오토 등의 총리들은 미일동맹을 강화했다 (보수적 성향).

 

결정적 사건: 센카쿠 열도에서의 어선 충돌 사건. 이전까지의 중국과의 관계가 고이즈미 이후로 틀어지는 경향은 있었지만 큰 갈등은 없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일본의 해경이 중국 배를 박아서 잡았는데 - 중국이 예상 이상으로 강경하게 대응한다. 일본이 깜짝 놀라서 대책을 요구한다. 특히 민주당이 너무 저자세 외교를 했다며 민주당이 지지를 잃어버린다.

 

당시 중국이 회토류를 가지고 보복하겠다고 선언. 수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 주요 수출품에 필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경제안보의 출발점. 자원의 무기화. 과거 석유를 사용한 중동처럼 중국이 회토류를 가지고 사용.

 

무역 보복. 싸드 배치에서 중국이 수입/수출의 규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 비대칭적인 상호의존: 상대는 나에게 10%밖에 의지하지 않는데, 나는 상대에게 50% 의존하고 있다. 그럼 상대는 나에게 원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중국에 대한 인식 변화. 미국이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움직임. 중국의 시진핑 등장 - 신형 강대국가 강조. 동일본 대지진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도모다찌 작전".

 

90년대 중반 이후로 북한의 미사일/핵 위협, 중국의 부상/공세적인 외교정책,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쇠퇴 - 파트너로 일본을 요구, 미일동맹이 훨씬 강화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일본의 집단적 자유권 행사에 대한 제한이 미일동맹을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 집단적 자유권에 대한 요구. 14년도, 아베 내각, 해석개헌 실시.

 

 

78년도 처음 만들어진 지침(냉전기), 탈냉전에서 변화. 97년도 중국의 강대국으로의 부상, 미국의 군비 축소/일본의 역할 확대. 주된 위협이 중국, 북한으로 명시. 전수방위 원칙 + '동맹국 공격에 대응한다' <- 해석개헌을 해야 가능. 미국에 대한 공격에 대응한다는 의미.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공격받는다면 일본군이 들어올 수 있다. 관련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동맹 강화. TPP 시도. 15년도 타결. 일본의 입장에서는 가장적인 자세, 자민당은 소상공인 등이 타격을 입기 때문에 지지층이 반대할만한 TTP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베가 과감하게 체결. 중국에게 대항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과 협력하겠다고 말한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무역 보복을 걱정해서.

 

2017년도 보호주의 강조, 미국 중심주의 강조 트럼프 등장. 탈퇴. 경제부분에서 미국이 믿을 만한 파트너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애매모호. 다시 트럼프가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돈다. 

 

 

민주주의 추구, 시장지향 경제 지향. 큰 나라들이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 - 중국에 대항. 잘 되지 않았다.

 

2012년 아베 집권 직전에 저널에 투고. 태평양에서의 평화와 안정이 인도에서의 평화와 안전과 불가분하다. 인도 태평양 전략의 부상.

 

2007년에 아베가 인도 방문, 인도양의 의미 한편으로 인도를 의미.

 

2016년 아베 총리, 자유롭고 열린 태평양 주장. 미국을 끌어들이는 인도태평양 구상.

 

일본이 제시한 지역개념. 미국이 호응. 최근의 전세계적인 지역개념/전략은 일본이 선도한 내용들이 있다. 다만 인도태평양에 대해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중국을 안보적인 위협이라고 느낀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이익관계 때문에 배제를 바라지 않는 국가들이 있다. 지금은 진행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재인 정부에서는 거부했다. 일본이 제안했으나 거부. 윤석열 정부에서는 한국판 인도태평양을 하겠다고 주장.

 

미일동맹이 탈 냉전기, 중국의 부상에서 훨씬 강화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일본의 이익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을 돕겠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 강한 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 유리한 핑계가 된다.

 

 

 

중국을 바라보는 인식이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일본은 중화질서의 내부에 속해있지 않았고 외부에 존재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사고. 대등하게 생각한다. 

 

중일 역사문제의 핵심은 '난징대학살'을 일본이 인정하느냐.

 

전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다음 조약을 맺은 것은 대만. 유엔에서도 대만이 오히려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경제관계가 지속되었다.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 않는 한 경제관계는 늘 지속되는 법이다.

 

일본이 내세우는 원칙. 정경분리: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다. 정치로는 대만을 우선시한다 해도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다. 미국이 돌변하게 되면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게 된다.

이때 중국이 요구한 3가지 원칙. 

1)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을 대표할 유일한 정부이다.

2) 대만은 중국의 불가분의 영토이다.

3) 평화조약이 불법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

인정하라고 요구. 일본에서 오케이 하고 받아들인다. 대신 중국에서는 배상금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이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던 건 아니고 다양한 혜택을 주고, 중국 또한 엄청나게 어렵게 살면서

(대약진 운동 등으로 3천만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마오쩌뚱이 시골을 지나가는데 곡식들이 막 익어있으나 그것을 참새가 먹고 있어서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발언했다는 게 유명하다. 때문에 참새를 엄청나게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과적으로 벌레들이 엄청나게 탄생해서 흉년이 왔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만큼 경제가 어려우니까 중국이 원하는 것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었고, 그것을 일본이 국교 수립을 통해 제공했다.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 단순한 국교 정상화뿐만 아니라 평화의 약속. 잘 진행되게 된다.

 

89년도 천안문 사태. 민주화 운동의 강제 진압. 서구 국가들이 엄청나게 비판. 일본은 온건하게 대응. 관계를 좋게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

중일관계를 왜 좋게 가져가고 싶었는가? 경제적인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90년대 중반, 중국이 일본에게 제 2의 무역상대국. 일본은 중국에게 제1의 무역상대국. 일본이 더 중국에게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경제관계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과거의 문제가 갈등으로 등장하게 된다. 어느 국가나 서로를 필요로 할 때는 떠오르지 않으나 서로 만족하게 되면 이슈가 발생하게 된다. 오히려, 필요할때는 정부가 시민사회를 억압해 발언하지 못하게 하는 면까지 있다.

 

한일관계에 대해, 베트남 시민사회 또한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는 오히려 싫어한다. 한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충분한 발전을 거치면 당연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80년대부터 이슈, 역사문제에서부터 출발. 교과서 검증. 하나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진출이라고 표기. 쟁점이 되어서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85년에 나카소네 총리가 야스쿠니를 간 적이 없는데, 전범의 역사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가게 되면서 역사 문제가 시작되었다.

 

90년대 - 중국이 대만 쪽으로 미사일 위협. 성장하게 되면서 더 커지게 되면 위협이 될 것이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2000년대 까지만 해도, 정냉경열: 정치는 냉랭하지만 경제는 아주 뜨거운 상황.

 

특히 중국의 경우, 대일신사고 - 일본에 대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많이 가졌다. 일본의 기술을 많이 배우자. 오히려 중국의 국민들이 일본을 싫어하게 되면서 단절하게 된다.

 

2005년, 큰 시위 발생. 일반 중국인들이 일제 차가 지나가면 올라가서 때려부수고 일본 사람들의 가게를 부수는 사건 발생. 첫번째 가장 큰 반일감정을 보여주는 사건. 일본에서 중국을 아주 싫어하게 되는 계기. 정냉경열 상태가 있었지만, 부정적으로 향하게 된다.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이 발생하게 된다. 중국이 일본의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거대하지만, 중국에서는 일본에서의 무역이 감소하게 된다. 다시 말해 중국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는 변화가 발생한다.

실제로 일본은 3위로 물러나고 2위로 중국이 올라갔으며, 그 해에 센카쿠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 중 도쿄 도지사는 센카쿠를 구매하겠다, 국유화 하겠다는 발언. 센카쿠 자체가 개인이 사용하는 열도 - 섬이었다.

 

 

최근의 중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은 여러가지 갈등요인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 경제문제에서 여러가지 협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

 

2018년 중일 우호조약 40주년을 계기로 해서 시진핑과 아베가 만난다. 제 3국 인프라를 함께 진출하자고, 우호적인 방향으로 진행. 기본적인 방향성은 견제를 하겠지만, 일방적으로 견제하는 일은 없고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의 흐름이 있었다.

 

인도태평양도 기본적인 방향은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지만, 무조건 중국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입장,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 <-> 일본 생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