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치론 (2) 근대 일본의 형성과 제국주의
- 총리와 수상의 차이: 둘이 동일하다.
수상은 내각 총리 대신의 다른 이름이다.
요시다 시게루라는 사람이 중요하다. 아베 총리야 다들 알고 있을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한국 사람들은 과거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 아시아 전쟁으로 인한 내용을 오늘 다룬다.
임진왜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를 따르던 집단과 또다른 집단의 파가 갈려서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도쿠가야 히에야스가 승리하였다. 1603년에도 막부라고도 불렸는데 일본은 원래 공식적으로 천황이 왕으로 존재하는데 하나의 혈연에서 지속되었다고 주장하나 사실 과거에는 천황은 힘이 없었고 무인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막부가 끝나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되며 오다 노구나가 등이 등장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야 히에야스가 등장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지배 방식은 서양 방식으로 봉건제라고도 하지만 사실 중앙집권제였다. 전체 지역을 지배하지는 못했고 각 영토마다의 전통과 지배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분연제라고도 하는 왕이 전체를 통치하는 방식을 가져가지는 못했다. 그곳에 군부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즉 어떤 땅은 봉건제가 지속되었고 어떤 땅은 도쿠가야가 직접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방식이었다. 그의 집안이 장군으로서 지배하고 있고 천왕은 정당성은 있을지언정 권력은 없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오래전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였으며 옛날 유럽식의 봉건제가 혼용된 일본과는 다르다. 원래의 지배계층을 지우고 다이묘를 지운다던지, 다이묘를 끌어내리고 다른 다이묘를 세운다던지의 일들이 있었다.
- 참근교대제는 일종의 볼모제이다. 1년은 자신의 땅에 오며 재산을 축적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몇백명이 한꺼번에 왔다가 돌아가도록 하여 자본을 소비하게 함으로 군사력을 쌓지 못하게) 또한 자식과 부인들을 영토에 남겨놓고 가게 하였다. 정치학 및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도시들을 상당량 활성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동하면서 자본을 소모하는 집단들이 다량 발생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표현으로 숙박업 등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결과적으로 상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무인들이 권력계층이었던 일본에서 돈을 만지는 상업가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신분은 높지만 가난한 사무라이와 신분은 낮지만 부유한 자본가가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계기였다. 내부적인 계급적 모순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 막부시대는 1630년대 쇄국정책으로 변화하면서 인공섬 안에서만 서양과 무역할 수 있도록 강하게 제한했다. 이는 외부의 서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지배계층에게 위협이었기 때문에. 데지마라는 섬.
기독교를 금지하게 되는데 막부는 기독교에 부정적이었다. 왕이 최고여야 하는데 신이 최고이며 심지어 왕과 쇼군마저도 그 밑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고 평등사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주교 사람들이 난을 일으켜 중앙정부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1630년 이후에는 포르투갈인들도 못 오게 하고 네덜란드인들만 오게 하였다.
1720년부터는 기독교층만 제외하고 올 수 있도록 변화하였다. 남양이라고 하는 파란의 남자를 사용하는 일로 서양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과 중국과 비교한다면 조선은 굉장히 서양사회에 대하여 닫혀있는 나라였지만 일본은 18세기부터 알아보고 있었으며 이후 적대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 아편전쟁 1840년.
영국이 아편을 수출품으로 삼아 중국에 무역을 했는데 아편은 양귀비로 만들어지는 제작하기 쉬운 아편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아편에 빠져있으니 국가가 피폐하게 되었고 그걸 막으려고 하자 영국이 반발하며 전쟁이 발생했는데 중국이 패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패배에 놀라워했다.
1854년에 무역하자며 개항하자고 패리가 왔으며 이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계층은 서양의 무력을 알고 수락하였다. 우리나라와는 반대이며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굉장히 배타적이었던 조선과는 달리 개항을 하게 되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의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약한 무력으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훗날 바꾸려고 했다. 동시에 우리나라에도 같은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다.
천왕이 받아들여야 했는데 받지 않았다며 많은 무인들과 사무라이가 비판했다. 기존의 근대국가가 아닌 막부체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천왕의 허락이 없었음을 빌미로 비난하며 근대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대국가의 일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키워낸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나간 인재들이 되었다.
1868년에 명치 = 메이지 = 천왕의 이름, 유신이란 말은 새롭게 한다는 뜻 즉 개혁하고 혁명한다는 뜻으로 훗날 우리나라도 박정희가 유신을 언급하는데 당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이들이 개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가 경제발전을 추진한것이 아닌가 교수님의 개인적인 생각.
실제로 메이지 유신이 찬란한 혁명은 아니었고 뭐든지 피해받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충돌과 갈등이 존재하면서 여러가지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사람들은 군벌에서 조수변이라고 하는 사람들 계층이 위주로 참가했으며 야마구치현 혹은 사츠마변 출신이 상당히 많이 총리 출신이 된 것은 그때의 영향이라고 한다. 조수변의 이들은 막부와 친하지 않았고 막부를 무너트리고 천왕 혹은 왕을 내세우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당연히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진전쟁이라고 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쿠시마의 세력들은 막부를 지지했고 메이지 체제를 지지하는 이들이 싸운다던지의 일들이 있었다. 일본은 지역감정이 없으나 역사를 공부한 이들인 후쿠시마같은 무진전쟁에 패배한 이들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있다던가.
1871년 지금의 도도부현 체제, 과거에는 폐번치현이라고 부르는 현 체제로의 돌입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
1873년 징병하게 되면서 칼은 원래 사무라이만 가질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무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왕이 용병을 고용해서 돈 많은 놈이 이겼지만 프랑스에서 왕이 없어지면서 나폴레옹은 용병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국민을 징집하여 군대를 만듦으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는 일의 시초가 되었다.
1877년 세이나 전쟁, 사이나 다카무리라고 하는 우에노 공항에 몸집이 큰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끌고 있는 동상이 존재하는데 그 사람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메이지 유신에서 모두가 만족하지 않았고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사였지만 권력에서 실각하면서 사무라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었으며 정한론(정벌해야 한다 한국을)을 말했고 계급적 불만이 쌓이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지 유신의 혼란이 정리되면서 안정적인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기존의 신분제를 철폐하게 되고 (사무라이의 특권을 삭제하고) 사무라이들이 상권쪽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지원도 했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글이 발표되는데 개요대학의 설립자인데 만원짜리에 나온 사람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변방에 있지만 일본의 정신은 이웃국가들의 개혁을 기다려서 함께할 수 없고 서양 국가들과 정신을 함께하고 있다. 아시아를 떠나서 서구와 가까워져야 한다." 일본의 정치가들이 부정적인 의미로도 긍정적인 의미로도 몸은 아시아에 있어도 정신은 아시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정체성이 서구를 목표로 하고 제국주의적 시각을 가지기 시작하는 일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의 전략 혹은 정책은 '서양 따라잡기' 라고 볼 수 있다. 서구의 열강들이 제국주의화되고 식민지배를 펼쳐나가게 되면서 결과론적으로 조선이 식민지배 되면서 옳은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 서구를 따라가다가 그들과 동일한 선에 서게 되면서 길을 잃고 정체된 상황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캐치 업. 따라가기.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대 일본제국 헌법이라고 당시에는 표현했다. 당시의 헌법 체계는 자신들과 유사한 국가인 독일식의 법을 따라가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법은 일본법을 많이 따라갔기 때문에, 법학과의 오랜 교수님들은 독일에 가서 공부했다고 한다. 메이지 헌법은 완벽한 자유주의법은 아니고 천황의 주권을 존중하고 있지만 의회제를 도입하고 귀족원(천황이 뽑는)과 중의원(투표로 뽑는)을 만들었다. 일본이 해군제도는 영국식 경찰과 사법제도는 같은 식으로 짬뽕해왔지만 잘 발전했다.
1894~1895년 청일전쟁이 발생하면서 그 발전을 증명한다. 그 배경에는 동학운동 등의 일이 발생했으나 어쨌든 청나라로부터 대한민국을 빼앗아오기 위함이었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화질서가 끝났다는 것을 상징했다. 당시 청나라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편없는 군대였고 훗날 그걸 당나라 군대라고 말한다는 속담도 있다. 청일전쟁을 조선에서 하게 되면서 외국인들이 목격하게 됐는데 청나라 군대는 형편없으면서 조선에게 잔혹하게 대했는데 일본인들은 규율있게 대하면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의 시작이라고 한다.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게 된다.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힘을 얻으려고 하고 영국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파트너로써 영국은 일본을 선택했다. 이후 1905년에 러일전쟁이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서 (러시아가 망해가고 있었고 신경쓸 게 많았다는 설도 있으나 진 건 진 게 맞다) 일본이 강대국임을 알렸다. 당시 인종차별적 서구적 시선이 있었는데 황인종이 백인종을 승리하면서 서양은 놀랐고 동양은 좋아했다고 한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훗날 하시모토라는 총리가 러시아와 동맹을 하면서 일본이 번영할때는 주도국가와 함께해왔다며 그만큼 러일동맹이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미국인가?
또 하나 중요해진 것은 천왕이 신격화된다는 것이다 (근대국가로 넘어가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천황에 대한 절대심은 메이지 유신 이후 형성된 것이다. 전세계적인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에 대한 위협이 있었고 그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존왕양이가 있었다.
아시아 국가들이 추구하는 비전이 무엇이냐. 부국강병. 나라를 부귀하게 하고 병사를 강하게 하자. 천왕을 되살리며 근대국가로 넘어가면서 추구해야 할 덕목이 부국강병이었으며 이때부터 정치적 노선이 갈리게 된다. 강병이 우선이라는 이들은 그 병사로 침략해 약탈하면서 부귀해진다고 생각한다거나, 입헌적 정책이 중요하다던지, 부국이 먼저로 부가 풍요로워지면 강병은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냐며 경제를 주장하는 등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오쿠노 도시미치는 부국을 먼저 이룸으로 강병을 함께 이룰 수 있음을 주장했다. 훗날 육사가 내세운게 경제 제일주의로 경제를 먼저 내세우고 안보가 뒤이은다는 주장이다. 최종적으로 오쿠노 파가 승리했다. (전쟁을 바라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토 히로무비가 이와쿠라 사절단에게 된통 당한 사건이다. 사절단은 원래 불평등조약을 변경하고 서양 문물을 경험하고 오라는 취지였는데 훗날 말하기를 서양의 사절단을 파견한 나라가 일본과 태국 두가지 뿐이며 결과적으로 식민지화가 안 된 나라도 저 둘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국제정시가 중요하다는 말의 근거였다.
서구의 경제정책과 사상들이 들어오며 중상주의와 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바라지 않는 정책인데 관료와 국가 혹은 엘리트 입장에서는 반가워할 수 없는 생각이었고 중상주의라고 하는 생각이 잘 받아들여졌다. mercatlism 상업을 통해 국가의 부귀를 증진할 수 있다. 중상주의는 멀리 나가면 제국주의와 연결되어 있는데 식민지배를 국가의 부귀를 위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상업과 무역에 개입하기 위해 강제적인 힘이 요구되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게 된다.
한국사람들은 일본과 유사한 경제발전을 이룩했기에 이해하기 쉽지만 서양 쪽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국가가 개입하여 어떤 기업은 장려하고 어떤 기업은 홀대하는지.
중상주의란 것들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보자면: 상업과 무력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장. 국가의 방향은 인민에 향하며 인민의 향방은 공업과 물산에 의한다. 국가가 개입하여 장려하고 증진을 촉진시켜야 한다.
메이지 정부가 상업정책을 국가주도로 한다던지 국가의 자금을 민간업체에 대여해준다던지의 일이 발생. 예를 들어 산업은행 같은 성장이 필요한 분야라면 성장을 오랜 시간 기다려주는 등의 혜택을 보장해준다. 이렇게 발전을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전후로 일본의 중상주의적인 산업정책은 메이지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에서의 산업정책을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시도하면서 성장한 측면도 있다. 후발주자들은 국가가 개입해서 이끌어줘야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일본이 성장하는 가운데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이 등장하게 되면서 당시 시기에 일본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싹트게 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혹은 '대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1912~1926년. 이후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버리면서 군부가 지배하다가 전쟁이 시작된다고 한다.
천황은 국가가 아니고 하나의 기관이라며 천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주장이 등장했다. 훗날 군국주의로 되돌아갔을때 이 주장 때문에 권력을 내려놓고 신체적 위험을 겪게 된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국가 내부에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자유주의가 퍼져나갔으나 밖으로는 제국주의가 판치는 아이러니한 시대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노조라던가 운동이라던가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승전국이 되는 일이 있었다. 국제 연맹에서 상임위사국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1925년 남성의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남성 보통 선거권. 이전에는 나이 25세 이상에 일정 이상의 국세 남입자만 대상이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고 시끄러워지는데 1930년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경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조선인을 죽이고 발음이 안 좋은 사람도 죽였다고 한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도 죽였다고 한다.
1929년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지배하는 시대가 찾아오면서 극단적인 사상이 퍼져나가는 시대가 찾아온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가 강한 힘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면서 극단적인 정책이 지지를 받는 시대가 되었고 민주주의가 아닌 식민주의가 득세하였다.
1931년에 만주 사변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일본군이 있는 곳에서 중국군이 폭발사건을 일으켰다며 만주사변에서 정변을 일으키면서 만주국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푸희 황제인데 그를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황제를 데려다가 만주국의 황제로 앉히게 되었다. 그는 다인족 국가를 지향해서 몽골인도 일본인도 여러 나라에서 불러서 국가 운영을 하게 된다.
만주국에서 일하던 자들 중에서는 박정희가 있었고 백선영이 있었다. 반일적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싫어하지만 군대에서 아주 좋아하는. 최규화라는 박정희 살해 이후 잠시 대통령으로 활동했던 사람과 정일건이라고 하는 총리를 한 사람 등등 만주국에서 일을 했었다. 만주국 출신의 군인과 관료가 우리나라의 50년과 60년을 만들었다.
중국 및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쿠데타등이 발생하면서 군벌주의가 강조되고 당시 총리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열 몇시간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훈련을 얼마나 못 했길래 이렇게 못 맞췄냐?" 기타 등등 국내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각종 인원들이 군부들이 암살사건을 진행하면서.)
아베노믹스의 기원이 다카아시 도리키오에게 있다고들 한다. 아베가 총리가 된 이후에 임명한 이들이 다카아시 도리키오를 연구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고 청나라가 없어지면서 혼란에 빠지며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일본 또한 한 몫을 담당했다. 만주지역 뿐만 아니라 힘을 과시하며 정복하려는 움직임을 벌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난징 대학살'이 존재한다. 중국의 한달동안 삼십만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그렇게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부정하는 일들이 있다. 본격적으로 일본이 전쟁의 시대에 접어든다.
일반 시민들이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중일전쟁에 돌입하면서 전시경제에 돌입하며 국가가 징벌하고 국가총동원령이 발표된다. 지금도 시골에 가보면 큰 소나무에 칼자국이 나있는데 송진을 연료로 사용해야 하니 긁어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놋쇠그릇을 가져가는 등의.
일본이 전시경제가 돌아가는 와중에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는데 '대동화 공영권' 이라는 말을 처음 주장한다. 아시아 국가들이 힘을 합쳐서 식민지 시대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미. 오늘날의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시초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반공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비판점은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끌려고 했으니 평등은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이탈리아-일본 동맹. 독일과 일본이 패배했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 등이 일본의 성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서구 세력들이 힘을 합쳐 아시아인 일본을 경계했다던가.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이 일본의 자산을 동결시켜버린다.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석유를 못하게 끊어버렸다. 즉 일본의 관점에서는 밥줄을 끊어버렸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한다.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고 미국을 이길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생산력의 차이가 크게 난다) 군부의 강경파는 강한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일본의 만화 중에서 부상당한 사령관이 비행장에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는데 비행기가 마지막에 도착하니 사령관이 쓰러졌고 만져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정신력. 강조!
전쟁을 하게 되는데 현실적인 해석으로는 "어차피 가만있으면 죽으니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 반응할 것이고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설마 전쟁을 하겠냐고 무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계속 이기다가 중간에 패배하고 나서 작아졌다고 한다.
전시경제에서는 국가가 중요하다. 대기업 위주의 정책은 그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많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강력해진게 아니냐 하는 말이 있다.
- 아무튼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패배 가운데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이 바로 원자폭탄 투하이다.
일본이 패배하는 와중에도 계속 싸워나가자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수를 써야겠다 하는 생각을 미국이 하게 되는데, 태평양 전쟁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글에는 '서양인들은 당연히 일본이 그렇게 잘 싸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전시에 프로파간다로써 일본인들을 원숭이로 비하하는 일. 전투를 거듭할수록 일본군들이 이기자 되게 큰 괴물로 표현하다가 다시 작은 야만적인 원숭이로 표현했다.' 즉 인종적인 편견이 원폭투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항복 의사가 있었음에도 왜 독일에는 원자폭탄을 터트리지 않았으면서 일본에게는 터트렸냐는 비난은 아시아인들인 인류학적 관점으로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던 게 아니냐.
이게 전쟁의 종식을 앞당겼으니 잘했다는 말과 일본의 군부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킨 것인데 일본의 백성들은 잘못한건 아니지 않느냐. 총력전이었고 일본의 백상들도 다했으니 괜찮다는 말고 있고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때 당시 원폭으로 인해 3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이슈된 것은 미국의 사과이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 당시 민간인들에 대해서 피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있긴 했으나 일본은 침략국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일본의 주장을 변화시키게 된다. 원자폭탄으로 인해 피해입었다는 인식을 받으면서 피해국가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히로시마 공원을 보면 한편으로는 평화를 위하니 긍정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해의식을 높이면서 자신이 전쟁 침략국이라는 인식을 흐린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있다.
유럽 총 참회론. 천황에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 미국이 지배하게 되면서 1945년부터 52년까지 연합국의 이름으로 지배되면서 일본에게 주권은 없었다. 미국은 원래 천황을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책임이 천황에게 있는게 아니냐) 노스벨리티의 국화는 천황은 신격화된 존재인데 제거하면 강한 저항을 받을거라고 생각하고 맥아더와 합의하면서 천황이 더이상 신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게 되고 맥아더는 편안한 자세이고 천황은 굳어진 자세를 하면서 천황의 권위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유명한 사건은 도쿄 전범재판이 있었는데 과거에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이번부터는 전범재판을 열었다. 그러나 이는 비판점이 있었는데 결국 승리의 역사인데 국가간 전쟁을 벌인 것을 가지고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는 것이 옳느냐란 주장이 있었다. 지금은 인도주의가 널리 퍼지면서 당연하게 되었다고 해도.
인도인이 일본인들의 편을 들면서 이건 승자의 정의라며 미국과 영국 또한 전범을 저질렀을 텐데 일본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옳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패전 이후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국을 환영했다고 한다. 전쟁 때문에 힘들게 살게 되면서 미국이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하고 새로운 정책들을 펴게 되면서 하늘로부터 선물이 왔다고 받아들이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천황제가 존속되어 지금까지 내려왔다.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와 역사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을 주장하면서 메이지 헌법을 통해 의회주의가 발전했다고 한다. 국가의 발전전략에 있어서의 캐치업이 중요한 방향성이었다. 그런 가운데 제국주의에 일본 또한 동참했으나 후발주자에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견제당하면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45년 이후에 경제가 최악이 되었다가 50년부터 일본 경제가 되살아나게 되면서 서동 이후 경제로 2위가 되면서 "어떻게 이렇게 폭삭 망했던 나라가 다시 성공했는지" 에 대해 궁금해하게 되면서 일본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었다.